카프카는 1883년 7월, 체코 프라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서남부 지방의 체코계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어렵고 궁핍한 어린 시절을 지나 독일계 유대인과 결혼했다. 카프카는 그러한 아버지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카프카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독일인 학교에 입학하여 독일인 김나지움까지 다녔다. 이후 프라하 대학에 입학하는데, 이때의 전공도 아버지의 뜻대로 법학으로 바꾸게 되었다. 법학을 졸업한 카프카는 개인 변호사 사무실, 지방법원 형사법원에서 일하며 직장 생활과 글쓰기를 병행하는 삶을 살았다. 노동자 재해보험협회의 직원으로 일하게 되며 노동 시간이 적었던 카프카는 본격적으로 직장과 글쓰기를 병행하며 본인의 작품 활동을 늘렸고, 이때 『변신』, 『선고』 등의 작품을 출판했다. 다만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발표한 작품은 일부였으며, 그마저도 주목받지 못하여 그는 스스로를 무능하고 가치 없는 사람이라 여기며 살아갔다.
카프카는 생의 마지막 시기에 폐결핵과 싸우다 번진 후두결핵으로 투병하며 「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일족」을 완성했다.
“우리가 없어진다고 해도 그렇게 아쉬워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요제피네는 (…) 지상의 고통에서 구원되어 우리 종족의 무수한 영웅들 속으로 기꺼이 사라질 것이다. 그녀는(…) 더욱더욱 강화된 구원을 받아, 역사를 등한시하고 있는 우리들에게서 잊혀질 것이다.”
그는 1924년 6월 3일, 41세의 생일을 맞기 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
프라하에서 유대인 혈통으로 태어나 독일어로 교육받은 서방 유대인이라는 측면에서, 카프카의 문학에는 조국과 공동체보다는 이방인 혹은 국외자에 가깝게 살아가며 느낀 소속감 없는 불안과 단절감이라는 특성이 강하게 담겨 있다.
『단식광대』를 포함한 카프카의 단편들을 읽으며 든 첫 생각은 일기 같다는 감상이었다. 마치 날짜만 적으면 카프카가 적은 일기라고 착각할 만큼 문체와 표현에서 일기의 느낌이 났다. 이와 유사하게 그의 소설은 자전적이다.
카프카가 말했듯 그는 도끼처럼 우리를 깨부수고자 했다. 그 도끼가 과연 어디에서 나왔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고찰은 그의 인생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생각이 그의 소설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글을 쓸 때는 제가 실제로 한 걸음 자립하여 아버지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 도피에서는, 뒤쫓아온 발에 밟혀 일부가 떨어져 나간 몸뚱이를 옆으로 질질 끌고 가는 벌레가 연상되었을지라도 말입니다.”
이는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에서 카프카가 쓴 글이다. 이 구절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변신』이 떠오른다. 아버지의 강요로 법학 박사가 되고 원하지 않는 직장 생활을 계속해야 했던 그의 삶과, 가족을 위해 일해야 했던 그레고르의 삶은 비슷한 맥락 속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단식광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카프카는 인생 말년에 후두결핵을 앓았다. 먹지 못하고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 카프카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어떤 도끼를 던지고 싶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지난 수십 년 간 단식 광대에 대한 흥미는 매우 줄어들었다”
이야기는 시작부터 주인공을 부정하며 출발한다. 주인공은 시대에 뒤처진 인물이다. 과거에는 단식 광대의 인기가 많았으며, 많은 사람이 몰려와 그를 구경했다. 어른들은 단식 광대를 구경하고 아이들은 이를 신기해했다. 그는 폐관 수련에 들어간 수도승처럼 우리에 갇혀 있다.
사실 이 첫 문장을 보고 단식과 광대라는 두 단어가 어울리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광대는 활동적이고 움직이며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지만, 단식은 정적이고 자기파괴적이며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은 단식 광대가 단식기간에는 결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강제로 시킨다 하더라도 최소량의 음식도 먹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의 예술의 명예가 그것을 금지시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