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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연기가 되어 너희는 공중으로 오른다. 그리고 너희는 구름속에 무덤을 갖는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누울 것이니.”
임레 케르테스는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작가로, 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보다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그의 수상 경력보다도, 그가 어린 시절 직접 경험했던 수용소의 기억이다. 임레 케르테스는 192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고, 열네 살이 되던 1944년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후 그는 부헨발트 수용소 등을 거치며 가까스로 생존하게 된다.
아우슈비츠는 단순한 강제노동수용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절멸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절멸수용소였다. 인간은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렸고, 삶은 하루아침에 제거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인간의 존엄, 윤리, 자유와 같은 가치들은 그곳에서 철저히 무너졌다. 케르테스는 바로 이러한 공간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렇기에 그의 문학은 단순한 회고록이나 역사적 증언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인간은 과연 이러한 세계를 경험한 이후에도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는 바로 그 질문 위에서 시작되는 작품이다. 작품의 첫 문장은 매우 단호하다.
“아니오.”
철학자가 **“왜 아이를 가지지 않았는가”**라고 묻자, 화자는 거의 본능적으로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 “아니”는 단순히 출산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거부이며, 인간 역사에 대한 불신이고,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망적인 선언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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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나는 바로 그 즉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본능적으로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능이 우리의 본능에 반하여 작동하는 것이, 말하자면 우리의 반(反)본능이 우리의 본능을 대신하고, 더욱이 본능인 것처럼 작동하는 것이 이미 아주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다. – 이를 한낱 재치있는 말장난 정도라 생각한다면, 이처럼 적나라하고 비참한 진실을 그저 재치있는 말장난 정도라 생각한다면, 이처럼 적나라하고 비참한 진실을 그저 재치있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한다면, 나는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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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는 시점으로 보면 이미 끝난 사건이다. 전쟁은 끝났고, 화자는 살아남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시 사회로 복귀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글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고, 결혼도 한다. 그러나 작품을 읽다 보면 화자는 단 한 번도 진정으로 ‘아우슈비츠 이후의 정상적인 삶’ 속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에게 아우슈비츠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잠식하고 있는 기억이다. 사랑을 하려고 할 때도, 미래를 떠올릴 때도, 인간을 믿으려 할 때도 그는 다시 수용소의 기억으로 되돌아간다. 그의 삶은 끊임없이 과거로 회귀한다.
화자는 단순히 수용소에서 끔찍한 일을 겪은 피해자가 아니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통해 인간 문명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인물인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가, 문명은 얼마나 쉽게 폭력으로 변할 수 있는가를 너무 일찍, 너무 깊게 목격해버린 것이다. 작품 속에서 화자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아우슈비츠는 단지 과거에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인간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가능성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정상적인 삶 속으로 완전히 돌아가지 못한다. 세계는 이미 한 번 무너졌고, 그는 그 사실을 잊을 수 없다.